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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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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시노 전투는 1575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다케다 가쓰요리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일본 센고쿠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다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조총을 활용한 방어 전술과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다케다 군의 기병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승리했다. 이 전투는 조총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지만, 3단 사격과 같은 전술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존재한다. 나가시노 전투의 결과로 다케다 가문은 쇠퇴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인으로 부상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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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나가시노 전투를 묘사한 병풍
나가시노 전투를 묘사한 병풍
전투명나가시노 전투 (長篠の戦い)
다른 이름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 전투 (長篠・設楽原の戦い)
시기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날짜1575년 6월 28일
장소미카와국 나가시노성, 시타라가하라
결과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오다 가문, 도쿠가와 가문
교전국 2다케다 가문
지휘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마가와 우지자네
오쿠다이라 사다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사사 나리마사
혼다 다다카쓰
이케다 쓰네오키
하시바 히데요시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니와 나가히데
오쿠보 다다요
마에다 도시이에
사쿠마 노부모리
가나모리 나가치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이시카와 가즈마사
다키가와 가즈마스
오쿠보 다다치카
시바타 가쓰이에
오다 노부타다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와타나베 모리쓰나
마쓰다이라 고레타다
다케다 군다케다 가쓰요리
이치조 노부타쓰
아나야마 노부타다
오야마다 노부시게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바바 노부후사
사나다 노부쓰나
다케다 노부자네
쓰치야 마사쓰구
오바타 마사모리
사나다 마사테루
하라 마사타네
다케다 노부카도
사나다 마사유키
사에구사 모리토모
다케다 노부토요
고사카 마사노부
병력 규모
오다-도쿠가와 연합군38,000–72,000명 (이견 있음)
다케다 군15,000–20,000명 (이견 있음)
사상자
오다-도쿠가와 연합군6,000명 사망 (도망병 포함)
다케다 군10,000명 사망
관련 전투
전투 목록오다 노부나가의 전투

2. 배경

나가시노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케다 가쓰요리 간의 북부 미카와 지역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다케다 씨와 도쿠가와 씨는 다케다 신겐 시대부터 전쟁을 계속해왔다. 다케다군은 병력에서 우위를 점했고, 미카와 북동부의 오쿠다이라 씨 등은 다케다 측에 합류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강력한 동맹을 맺은 이에야스였지만, 노부나가는 대등한 동맹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 협력 회사라 칭했지만, 사실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하청업체와 같았고, 노부나가는 이에야스를 다케다 군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했다.[6]

1573년 5월, 신겐이 병으로 쓰러지자 다케다군은 카이 국으로 철수하여 신겐의 죽음을 숨기고 가쓰요리에게 권력을 넘기는 데 주력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군의 움직임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혼다 다다카쓰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보내 나가시노 성을 함락시켰다.[8] 나가시노 성을 되찾음으로써 이에야스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이에 맞서 권력 승계를 마친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군 주력을 이끌고 오쿠미카와 지역으로 진입, 도요카와 강을 따라 남하하며 동부 미카와 지역을 약탈하고 도쿠가와 가신들의 영지를 유린했다.[6][9][10]

카이 국·시나노 국을 지배하는 다케다 씨는 에이로쿠 연간에 준가의 이마가와 씨 영토를 병합하고(준가 침공), 겐키 연간에는 토토미 국·미카와 국 방면으로 침공했다. 미노 국을 장악한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했고, 처음에는 다케다 씨와 우호 관계였다. 그러나 쇼군 요시아키와 관계가 악화되자 겐키 3년에 반 노부나가 세력을 결집한 요시아키가 거병한다. 요시아키에 호응한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의 동맹국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침공(서상 작전)하면서 오다 씨와 다케다 씨는 결별했다.

신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서상 작전은 중단되었고, 다케다 군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씨, 아사이 씨 등 반 노부나가 세력을 멸망시키고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 “천하인”으로서의 지위를 계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다케다 씨가 철수하자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영토에 반격을 가하여 미카와·토토미의 실지 회복을 꾀했다. 1573년 8월에는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다케다 신겐의 급사를 의심한 아버지 사다요시의 결단으로 도쿠가와 측에 다시 합류하자, 이에야스는 그를 나가시노 성에 배치했다.

다케다 씨의 후계자가 된 가쓰요리는 토토미·미카와를 다시 장악하고자 반격을 시작했다.[40]

2. 1. 오다-도쿠가와 동맹과 다케다 가문의 대립

1573년 8월, 다케다 신겐이 죽자 다케다 가신이었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아버지 사다요시의 결단에 따라 일족과 함께 도쿠가와 측으로 배신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다마사를 다케다 가문으로부터 빼앗은 나가시노 성에 배치하여 다케다에 대한 최전선에 두었다. 2년 후인 1575년 4월, 다케다 가쓰요리는 1만 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다.[6]

나가시노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케다 가쓰요리 사이의 북부 미카와 지역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다케다 씨와 도쿠가와 씨는 다케다 신겐 시대부터 전쟁을 벌여왔다. 다케다군은 병력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미카와 북동부의 오쿠다이라 씨 등은 다케다 측에 가담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강력한 동맹을 가진 이에야스였지만, 노부나가는 결코 대등한 동맹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를 협력 회사라고 칭했지만, 사실상 불만을 말할 수 없는 하청업체와 같았고, 노부나가는 이에야스를 다케다 군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다.[6]

1573년 5월, 신겐이 병으로 쓰러지자 다케다군은 카이 국으로 후퇴하여 신겐의 죽음을 숨긴 채 가쓰요리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군의 움직임에서 이상을 감지하고, 혼다 다다카쓰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파견하여 나가시노 성을 함락시켰다.[8] 나가시노 성을 탈환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이에 맞서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군 주력을 이끌고 오쿠미카와 지역으로 진입, 도요카와 강을 따라 남하하며 동부 미카와 지역을 유린하고 도쿠가와 가신들의 영지를 약탈했다.[6][9][10]

카이 국·시나노 국을 지배하는 다케다 씨는 에이로쿠 연간에 준가의 이마가와 씨의 영토를 병합하고(준가 침공), 겐키 연간에는 토토미 국·미카와 국 방면으로 침공했다. 미노 국을 장악한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했고, 처음에는 다케다 씨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쇼군 요시아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겐키 3년에 반 노부나가 세력을 결집한 요시아키가 거병한다. 요시아키에 호응한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의 동맹국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침공(서상 작전)했기 때문에, 오다 씨와 다케다 씨는 결별하게 되었다.

신겐의 급사로 서상 작전은 중단되었고, 다케다 군은 본국으로 철병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씨·아사이 씨 등 반 노부나가 세력을 멸망시키고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했다. 자신이 “천하인”으로서의 지위를 계승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다케다 씨의 철병에 따라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영토에 대해 반격을 개시하여 미카와·토토미의 실지 회복에 힘썼다. 1573년 8월에는 오쿠히라 사다마사가 다케다 신겐의 급사를 의심한 아버지 사다요시의 결단에 따라 도쿠가와 측에 재합류하자, 이에야스는 나가시노 성에 배치했다.

다케다 씨의 후계자가 된 가쓰요리는 토토미·미카와를 재장악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40] 오쿠히라 씨의 이반으로부터 2년 후인 1575년 4월에는 대군을 지휘하여 미카와에 침공하고, 5월에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2. 2. 나가시노성 포위

1573년 8월, 다케다 신겐이 죽은 뒤, 다케다 가쓰요리오쿠다이라 사다마사에게서 나가시노성을 빼앗아 자신의 전선 기지로 삼았다. 1575년 4월, 가쓰요리는 1만 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6]

나가시노 성에는 500명의 적은 병력만 있었지만, 200자루의 철포와 대철포를 준비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여 다케다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군량미가 부족해져 원군이 오지 않으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사다마사의 가신 토리이 스네에몬이 몰래 성을 빠져나가 오카자키성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5월 13일에 3만 군세를 이끌고 기후를 출발하여 오카자키성에 도착한 상태였다.[42]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도리이는 나가시노 성으로 돌아가던 중 다케다 군에게 붙잡혔다. 다케다 군은 성 안의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도리이에게 '원군은 오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고, 도리이는 이를 승낙하는 척했다. 그러나 도리이는 성 앞에서 약속을 어기고 "원군이 수일 내에 오니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외쳐 성 안의 사기를 높였다. 이로 인해 도리이는 곧 처형되었지만, 그의 용감한 행동은 성 안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42] 다케다 군의 오치아이 미치히사는 도리이의 용기에 감복하여 그의 처형 장면을 그린 기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3. 전투 경과

1575년 6월, 다케다 가쓰요리는 미카와 국을 침공하여[6][16] 수비병 500명에 불과한 나가시노 성을 1만 5천 명의 대군으로 포위했다.[9][16]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3만 명의 오다 씨 군을 이끌고 미카와로 향하여 이에야스와 합류했다.[9][17][18] 6월 26일 시타라가하라에 도착한 연합군은 그곳에 진을 쳤다.[9][17][19]

''신초고기''에 따르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다케다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말뚝 방어책과 토루를 구축했다.[16][17][18]

한편, 나가시노 성의 토리이 스네에몬은 오카자키 성으로 파견되어 증원 요청을 전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다케다 군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증원이 반드시 온다"고 성에 외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4][7][20]

나가시노 전투를 묘사한 병풍, 왼쪽 아래에는 혼다 다다카쓰가 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머리가 없는 시체는 마사카게 야마가타이다.


다케다 가신들은 가쓰요리에게 가이로 후퇴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결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가쓰요리는 오다 군의 병력이나 노부나가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연합군의 수를 과소평가하고 적이 약하다고 판단했다.[7][16]

6월 28일, 다케다 가쓰요리는 1만 2천 명의 주력군을 이끌고 시타라가하라 동쪽으로 진군했고, 3천 명을 남겨 나가시노 성 주변 포위를 유지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 다다쓰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비가스 산에 기습 공격을 명령했다. 6월 29일 이른 아침, 다다쓰구는 도비가스 산 뒤쪽에서 요새를 방어하는 다케다 군을 공격했다. 이로써 다케다 주력군의 후퇴로가 차단되고 후방에 적이 생겨 오다-도쿠가와 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7][9]

전투 상황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본진인 다카마쓰 산에서 전황을 살피고 전군을 지휘했다. 다케다 군은 반복적으로 돌격했지만, 매번 조총과 말뚝 방어책에 막혀 후퇴했다. 정오가 되자 승패가 점점 명확해졌고, 다케다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 ''신초고기''에 따르면 전투는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오후 2시경까지 이어졌다.[7]

3. 1. 나가시노성 농성전

1573년 8월, 다케다 신겐이 죽자 사다요시는 과감한 결단으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를 포함한 일족과 부하들을 이끌고 도쿠가와 쪽으로 투항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로부터 얻은 나가시노 성에 사다마사를 배치하여 다케다에 대한 전선에 배치하였다. 1575년 4월, 다케다 가쓰요리는 1만 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6][16]

나가시노 성에는 500명이라는 적은 병력밖에 없었지만, 200자루의 철포와 대철포를 준비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군량미가 떨어져 원군이 오지 않으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사다마사의 가신 토리이 스네에몬이 몰래 성을 탈출하여 오카자키 성의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4][7][20]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3만의 군세를 이끌고 기후를 출발하여 오카자키성에 도착했다.[9][17][18]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도리이는 나가시노 성으로 돌아가던 중 다케다 군에게 붙잡혔다. 다케다 군은 도리이에게 ‘원군은 오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도리이는 이를 거부하고 ‘원군은 수일 이내에 오니 절대 항복하지 말라’라고 외쳐 성 안의 사기를 높였다. 이로 인해 도리이는 처형되었지만, 그의 용기는 오치아이 미치히사를 감복시켜 그의 처형 장면을 기치로 삼게 했다.[4][7][20]

3. 2.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도착

오다 노부나가군 3만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군 8천은 나가시노 성 바로 앞의 시타라가하라에 도착하였다. 시타라가하라는 들판(原,하라)이라고는 해도 강을 따라서 구릉지가 몇 개나 이어지는 장소였기 때문에, 상대 진영의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노부나가는 이곳을 전지로 선정하여, 렌고 강을 수로로 판단하고 방어진 구축에 힘썼다. 강을 사이에 둔 대지 양쪽의 경사면을 깎아내 인공적인 급사면으로 만들고, 3중의 토루(土塁)에 마방책을 설치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야전(野戦)축성이었다. 노부나가 측은 철포대를 주력으로 하여, 수비하면서 다케다의 기마대를 쫓아 사격하는 전술을 세웠다.[9][17][19]

현지에 재현된 말 방책


노부나가는 시타라가하라 서쪽의 고쿠라쿠지 산에 본진을, 노부타다는 신미도 산에 진을 쳤다. 시타라가하라가 저지대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그곳에 진을 쳐, 지형을 이용하여 3만 명의 군대를 다케다 측에서 볼 때 큰 병력으로 보이지 않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렌고 강을 마주보는 앞쪽의 다카마쓰 산에 진을 쳤다.[7][9][17]

''신초고기''에 따르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다케다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말뚝 방어책과 토루를 꾸준히 구축했다.[16][17][18]

한편, 노부나가 도착 소식을 들은 다케다 진영에서는 즉시 군사 회의가 열렸다. 신겐 시대부터의 중진들, 특히 다케다 사천왕이라고 불리는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등은 노부나가가 직접 출진한 것을 알고 후퇴를 건의했지만, 가쓰요리는 결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가시노 성 견제에 3천 명 정도를 두고, 나머지 1만 2천 명을 시타라가하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이에 신겐 이래의 오랜 중신들은 패전을 예감하고, 죽음을 각오하여 모두 모여 술을 마시고 작별했다고 한다.[7][9][17]

3. 3. 도비가스 산 공방전

5월 20일 밤, 사카이 다다쓰구가 이끄는 히가시 미카와무리 외, 오다군 가나모리 나가치카 등의 요리키(与力), 철포 500자루를 가진 약 3000명(『신초고기』에 의하면 약 4000명)의 연합군 부대가 은밀히 도요 강을 건너, 나가시노 성 부근에 남아있는 다케다 군 쪽으로 남측 후방으로 돌아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녘에는 나가시노 성 포위의 중요한 곳인 도비가스 산 성채를 후방에서 강습하였다. 도비가스 산 성채는 본성과 4개의 성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기습으로 모두 함락되었다. 이로써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나가시노 성 구원이라는 제1목표를 달성하였다. 농성하고 있던 오쿠다이라군을 더한 사카이 기습대는 아루미 마을에 주둔 중인 다케다 군까지 소탕하여, 시타라가하라로 전진한 다케다 본대의 퇴로를 위협하는데 성공했다.[46]

이 도비가스 산 공방전으로 다케다 측은 가와쿠보 노부자네를 시작으로, 사에구사 모리토모, 고미 사다나리, 와다 나리시게, 나와 무네야스, 이이 야시우에몬 등 유명한 무장이 사망하였다. 다케다 패잔병은 본대로 합류하기 위해 도요 강을 건너 퇴각하였으나 사카이 기습대의 맹추격을 받았고, 나가시노 성 서해안, 아루미 마을에서도 고사카 마사즈미가 죽었다. 사카이 부대의 일방적인 전개였지만, 너무 깊이 들어간 도쿠가와 측의 후코즈 마쓰다이라 고레다다는 오야마다 마사유키에게 반격당해 사망하였다.

鳶ヶ巣山(토비가스야마) 砦터에 있는 장신의 싸움 鳶ヶ巣진 전몰장사의 무덤


섬네일


이 작전은 20일 밤에 합동 군사 회의에서 나온 사카이 다다쓰구의 발안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 회의 직후 노부나가는 사카이를 몰래 불러내어 작전 결행을 명했다. 다케다 군의 첩보를 염려하여 회의에서는 채택하지 않은 것이었다.[46]

3. 4. 시타라가하라 결전

設楽原決戦일본어은 1575년(덴쇼 3년)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가스 산 공방전의 대세가 정해졌다고 판단될 무렵, 퇴로를 위협당할 것을 두려워한 다케다군이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군 1만 2000명의 전투는 낮 무렵까지 약 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결과는 오다, 도쿠가와군의 승리였지만, 60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한편 다케다군은 1만 2000명의 희생자를 냈는데, 여기에는 도비가스 산 공방전의 피해도 포함된다. 오다, 도쿠가와군의 전사자는 대부분 이름 없는 아시가루 졸병이었던 반면, 다케다군의 전사자는 다케다 사천왕인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히데, 바바 노부하루를 비롯하여 하라 마사타네, 하라 모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마사테루, 쓰치야 마사쓰구, 쓰치야 나오노리, 안나카 가게시게, 모치즈키 노부나가, 요네자와 시게쓰구 등 유명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막대했다.[4]

다케다 가쓰요리는 간신히 수백 명의 하타모토에게 보호받으며 다카토 성으로 후퇴했다. 이후 우에스기 겐신과 화친을 맺고, 우에스기의 부대 1만과 이를 이끄는 고사카 마사노부와 합류한 후 가이로 퇴각하였다.

오다, 도쿠가와 측이 3000자루라는 양의 철포를 보유하고, 철포대를 3개로 나누어 탄을 채우는 시간을 줄이는 3단 발사 전법으로 최강이라 불리는 다케다 기마대를 패배시켰다는 것이 유명한 통설이다. 그러나 3000자루라는 양과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아 부정하는 학자가 많다. 다만,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의 철포대 투입과 기마대를 막기 위한 마방책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다.[4]

오다 노부나가군 3만 명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군 8천 명은 5월 18일, 나가시노 성 앞 세타가하라에 진을 쳤다. 세타가하라는 평야지만, 작은 시내와 습지를 따라 남북으로 여러 개의 구릉지가 이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적진 깊숙한 곳까지 볼 수 없었지만, 노부나가는 이 점을 이용하여 3만 명의 군사를 적에게 보이지 않도록 끊어서 배치했다. 작은 시내와 렌고 강을 해자로 삼아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이는 강을 사이에 둔 대지의 양쪽 사면을 깎아 인공적인 급경사면을 만들고, 삼중의 토루에 말 방책을 설치하는 등 당시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야전 축성이었다. 노부나가는 이탈리아 전역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즉, 노부나가 측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 가까운 철포대를 주력으로 하여 울타리와 토루로 방어하고, 다케다의 기병대를 맞아 싸우는 전술을 채택했다.

한편, 노부나가 도착 소식을 들은 다케다 진영에서는 즉시 군사 회의가 열렸다. 신겐 시대부터의 중진들, 특히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히데 등은 노부나가가 직접 출진한 것을 알고 후퇴를 건의했다고 전해지지만, 가쓰요리는 결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가시노 성을 견제하기 위해 3천 명 정도를 배치하고, 나머지 1만 2천 명을 세타가하라로 향하게 했다. 이에 대해, 신겐 이래의 오랜 숙신들은 패전을 예감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모두 모여 술을 마시고 작별했다고 한다.

다케다의 이러한 움직임을 본 노부나가는 "이번에 다케다군이 가까이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다. 모두 섬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군에서는 단 한 명의 피해도 나지 않도록 작전을 생각했다(『신초코키』 8권).

상대의 방심을 유도한 측면도 있지만, 철포를 주력으로 하는 수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다를 유인하려는 의도였다.

5월 20일(음력) 심야,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중신이었던 사카이 다다츠구를 불러, 도쿠가와군에서 궁술과 철포술에 능한 병사 2,000명을 선발하여 사카이 다다츠구에게 지휘하게 하고, 여기에 자신의 철포대 500명과 가네모리 나가치카 등 검사를 더하여 약 4,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기습을 명령했다(『신초코키』). 별동대는 은밀히 정면의 다케다군을 우회하여 도요 강을 건너 남쪽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진군하여, 다음 날 새벽에는 나가시노 성 포위의 요충지였던 도비가스 산 砦를 후방에서 기습했다. 도비가스 산 砦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감시하기 위해 축조된 砦였으며, 본 砦에 4개의 지 砦(나카야마 砦, 쿠마야마 砦, 우바가이나이 砦, 키미가후스코 砦)로 구성되었지만, 기습의 성공으로 모두 함락되었다. 이로써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나가시노 성 구원이라는 제1 목표를 달성했다. 더욱이 성에 틀어박혀 있던 오쿠히라군을 합친 사카이 기습대는 추격하여 아리우미촌(有海村) 주둔 중이던 다케다 지원군까지 소탕함으로써, 세쓰라가하라로 진격한 다케다 본대의 후퇴로를 위협하는 데 성공했다.

이 도비가스 산 공방전으로 다케다 측은 주장 가와쿠보 노부사네(가쓰요리의 삼촌)을 비롯하여 미에다 마사사다, 고미 다카시게, 와다 기요시게, 나와 무리요스, 이오오 스케토모 등 이름 있는 무장들이 전사했다. 다케다의 패잔병들은 본대와 합류하려는 듯 도요 강을 건너 후퇴했지만, 사카이 기습대의 맹추격을 받아 나가시노 성 서안 아리우미촌에서도 가스가 도라쓰나의 아들 고사카 마사스미(이름은 "마사스미"라고도 하나 불명)가 토벌되었다. 이처럼 사카이대의 일방적인 전개가 되었지만, 선행하여 너무 깊이 들어간 도쿠가와 측 후카미조 마쓰다이라 이타다만은, 후퇴하는 오야마다 마사나리에게 반격당하여 전사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나가시노 전투는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가스 산 공방전의 대세가 정해졌다고 판단한 다케다군이 퇴로를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군 1만 2000명의 전투는 낮까지 약 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결과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의 승리였지만, 연합군은 60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반면 다케다군은 1만 2000명의 희생자를 냈는데, 여기에는 도비가스 산 공방전의 피해도 포함된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의 전사자는 대부분 이름 없는 아시가루 졸병이었던 반면, 다케다군의 전사자는 다케다 사천왕인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바바 노부하루를 비롯하여 하라 마사타네, 하라 모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마사테루, 쓰치야 마사쓰구, 쓰치야 나오노리, 안나카 가게시게, 모치즈키 노부나가, 요네자와 시게쓰구 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아 그 피해가 막심했다.

가쓰요리는 간신히 수백 명의 하타모토에게 보호받으며 다카토 성으로 후퇴했다. 이후 우에스기 겐신과 화친을 맺고, 고사카 마사노부가 이끄는 우에스기 군 1만 명과 합류한 후 가이국으로 퇴각했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3000자루의 철포를 3개 부대로 나누어, 철포의 탄을 채우는 시간을 줄이는 3단 발사 전법으로 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 기마대를 패배시켰다는 통설이 있지만, 3000자루라는 숫자와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철포대 투입과 기마대를 막기 위한 마방책이 활약한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도쿠가와 가미카와국을 완전히 장악하여 후타마타 성, 다카텐진 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많은 우수한 병사를 잃은 다케다 가가쓰요리호조 가와의 외교 실패로 인해 급속히 쇠퇴하여 1582년 멸망에 이른다.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이 전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노부(信)'를 받아 '노부마사(信昌)'로 개명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를 정실로 맞이했다. 또한, 그 중신을 포함하여 영지 지배 등을 자손 대대로 보장받아, 사다마사를 조상으로 하는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는 메이지 시대까지 번창했다. 처형된 도리이 스네에몬은 후세에 가신으로 이름을 남겨, 그 자손은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4. 1. 오다 노부나가의 부상과 다케다 가문의 몰락

나가시노 전투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다케다 측은 바바 노부하루, 하라 마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와 그의 동생 사나다 마사테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사에구사 모리토모, 쓰치야 마사쓰구, 나이토 마사토요,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오바타 마사모리 등 다케다 신겐의 24장 중 많은 유명 지휘관들을 잃었다.[2][19][10] 이 패배로 다케다 가쓰요리는 더 이상 다른 영토를 정복할 여유가 없었고, 자신의 거점인 가이국으로 후퇴했다.[1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승리 직후 군대를 이끌고 다케다군이 점령했던 성을 하나씩 탈환했다.[19] 가쓰요리는 재편성을 거듭하며 이에야스를 계속 괴롭혔지만, 결국 다케다 씨는 나가시노와 시타라가하라 전투 패배 7년 후인 1582년에 멸망했다.[19]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와 에치젠 일향일揆 평정을 통해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화목을 이루어 반(反) 오다 세력을 복종시키고 “천하인”으로서 부상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도토미국의 스와하라성, 후타마타성을 공략하여 다카텐진성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다케다 씨는 나가시노에서 중신층을 포함한 많은 장병을 잃는 대패를 당해 영국의 동요를 초래했다. 이후 외교 정책을 재건하여, 사가미국 후호조 씨와의 갑상동맹에 더하여, 에치고국 우에스기 씨와의 관계 강화와 사타케 씨와의 갑사동맹, 사토미 씨 등 간토 여러 족속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578년 우에스기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우에스기 가게토라 사이에 오타테의 난이 일어났다. 가쓰요리는 호조 씨의 요청으로 출병했지만, 가케카쓰와 동맹을 맺고(갑월동맹) 양측의 조정을 시도했다. 가쓰요리의 철병 후 가케카쓰가 난을 평정한 것으로, 호조 씨와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가쓰요리는 간토 여러 족속과의 동맹으로 호조 씨를 견제하고, 오다 노부후사를 오다가에 반환하여 노부나가와의 화목을 시도했지만(갑강화약), 1582년 3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의한 다케다 영토 침공으로 다케다 씨는 멸망했다.

나가시노성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이 전공으로 노부나가의 편휘를 받아 “노부마사”로 개명하고, 이에야스의 장녀 가메히메를 정실로 맞이했다. 그 중신을 포함하여 영지 지배 등을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보증받아, 사다마사를 조상으로 하는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는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다. 다케다에 처형된 도리이 스네에몬은 충신으로서 이름을 남기고, 그 자손은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에서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

4. 2. 군사 전술의 변화와 조총의 중요성

나가시노 전투는 조총을 활용한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면서, 일본 군사 전술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투로 평가받는다.
조총의 대량 투입과 3단 사격 (논란)오다 노부나가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3,000정의 조총을 준비하여 병사들에게 지급하고, '3단 사격'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16][21] 3단 사격은 조총 부대를 3열로 배치하여 각 열이 순차적으로 사격하는 방식으로,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조총의 단점을 보완하고 지속적인 사격을 가능하게 하는 전술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3단 사격 전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논란이 많다.[2][7][22] 오타 규이치의 『신초고기』에는 3단 사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조총 부대 지휘에 대한 내용만 있을 뿐이다.[7][18][23] 조총의 수량에 대해서도 『신초고기』 원본에는 1,000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부 사본에는 3,000정으로 수정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16][18]
조총 운용의 실제와 다케다 군의 대응『신초고기』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등 5명의 지휘관에게 약 1,000정의 조총을 배치하고 적을 압박했다.[7][18][23] 또한, 사카이 다다쓰구 부대에 500정을 보내는 등, 실제로는 1,500정 이상의 조총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케다 가쓰요리 역시 조총을 활용했으며, 다케다 군도 약 1,000~1,500정의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양 군 간의 조총 보유 수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24] 그러나, 신겐 시대부터 조총 장비를 장려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군은 화약과 탄환의 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7][18] 반면, 노부나가는 무역항을 장악하고 해외 무역을 통해 탄약과 화약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결론나가시노 전투는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대규모로 활용된 전투였지만, 3단 사격과 같은 전술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오다 군의 승리는 조총의 화력뿐만 아니라, 병력 수, 지형 활용, 다케다 군의 전략적 판단 실수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25]

4. 3. 한국의 관점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한국 측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권력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총(화승총)을 이용한 전술은 당시 일본 전투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5. 참전 무장

나가시노 전투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가쓰요리가 이끄는 다케다 군이 참전했다.

진영주요 참전 무장
오다 군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타다, 기타바타케 노부이(오다 노부카쓰), 오다 타다히로, 시바타 가쓰이에, 다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가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불참설 있음), 사쿠마 노부모리, 미즈노 노부모토, 타카기 키요히데, 스가야 나가요리, 가와지리 히데타카, 이나바 이테쓰, 히네노 히로나리,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 가모 우지사토,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하나와 나오마사, 후쿠토미 히데카쓰, 노노무라 마사나리, 다니와 우지쓰구, 토쿠야마 노리히데, 니시오 요지, 유아스 나오무네, 가나모리 나가치카, 사토 히데카타
도쿠가와 군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카즈,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마쓰다이라 시게카쓰,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아마노 야스카게, 이시카와 가즈마사, 타카치키 키요나가, 혼다 마사쓰구, 혼다 타다카쓰, 혼다 마사시게, 혼다 노부토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토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타다요·타다사 형제, 오스가 야스타카, 히라이와 친키치, 나이토 노부나리, 나이토 이에나가, 와타나베 모리쓰나, 타나카 요시타다, 타카치키 마사나가, 시바타 야스타다, 아사히나 야스카쓰, 나리세 마사카즈, 쿠사카베 사다요시,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이 이에쓰구,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마쓰다이라 이타다·이에타다 부자, 마쓰다이라 키요무네, 마쓰다이라 신죠, 마쓰다이라 다다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동조 마쓰다이라가), 마쓰다이라 이에타다(가타하라 마쓰다이라가), 혼다 히로타카·야스시게 부자, 혼다 다다쓰구, 마키노 야스나리, 오쿠히라 사다요시, 스가누마 사다미츠, 사이고 이에카즈, 콘도 히데모토, 오가사와라 야스지, 토다 카즈니시, 오사와 모토타네, 세쓰라 사다미치(히다에서 대기), 오쿠히라 사다마사, 마쓰다이라 카게타다
다케다 군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노부카네, 다케다 노부토요・모치즈키 노부나가 형제, 이치죠 노부타카, 다케다 노부미츠, 아나야마 노부키미, 오야마다 노부시게, 야마가타 마사카게, 야마가타 마사츠구, 나이토 마사히데, 바바 노부하루, 츠치야 마사츠구・마사츠네 형제, 츠치야 사다츠나, 사나다 노부츠나・마사테루・마사유키(무토 키헤이) 형제, 카마하라 시게스미, 하라 마사타네, 아토베 카츠스케, 나가사카 미츠카타, 오바타 켄시게(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노부사다 부자, 아마리 노부야스, 요코타 야스카게・하라 모리타네 형제, 안나카 카게시게, 요네쿠라 시게츠구, 오가사와라 노부미네, 오바타 마사모리, 하츠카노 마사히사, 오카베 마사츠나, 아사히나 노부오키, 오이 사다키요, 무로가 노부토시, 에코우지 카이카와, 이와테 타네히데, 야시로 마사나가, 네즈키 츠키나오, 호리 무테에몬, 야나자와 노부토시, 다타 마사하루와 아들 신조 마사카츠(다타 삼팔랑의 자손), 유가와 신지, 카와쿠보 노부사네, 미에다 마사사다・모리요시・모리미츠 형제, 와다 기요시게, 고미 타카시게, 이오오 스케토모, 나와 무리노스케, 와케 젠베이, 쿠라가노 히데카게, 하라 타네나리, 타카사카 마사스미, 오야마다 마사나리, 아마미야 이에츠구, 야마모토 칸조 신규


5. 1.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연합군은 시타라가하라 결전 본대, 도비가스 산 공방전 부대, 나가시노 성 농성전 부대로 구성되었다.

구분소속주요 참전 인물
시타라가하라 결전 본대오다군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타다, 가와지리 히데타카,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사쿠마 노부모리, 다키가와 이치마스, 삿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미즈노 노부모토, 노노무라 마사시게, 아케치 미쓰히데(일설)
도쿠가와군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이시카와 가즈마사, 혼다 다다카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도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다다요, 오쿠보 다다스케, 오쿠보 다다타카, 다카기 기요히데, 나루세 마사카즈, 구사카베 사다요시
도비가스 산 공방전오다군가나모리 나가치카
도쿠가와군사카이 다다쓰구,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마쓰다이라 고레타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마쓰다이라 기요무네, 혼다 히로타카, 오쿠다이라 사다요시, 스가누마 사다미쓰, 사이고 이에카즈, 곤도 히데모치, 시타라 사다미치
나가시노 성 농성전오다군오쿠다이라 노부마사, 마쓰다이라 가게타다
나가시노 전투 주력 부대오다군 장군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타다, 오다 노부카츠,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타키가와 가즈마스, 사쿠마 노부모리, 미즈노 노부모토, 다카기 키요히데, 스가야 나가요리, 카와지리 히데타카, 이나바 요시미치, 히네노 히로나리,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 가모 우지사토,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토시이에, 하라다 나오마사, 후쿠토미 히데카츠, 노노무라 마사시게, 니와 우지쓰구, 도쿠야마 노리히데, 니시오 요시쓰구, 유아사 나오무네
도쿠가와군 장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마가와 우지자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카즈,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마쓰다이라 시게카쓰,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아마노 야스카게, 이시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혼다 시게쓰구, 혼다 타다카쓰, 혼다 마사시게, 혼다 노부토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토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타다요, 오쿠보 타다스케, 오스가 야스타카, 히라이와 치카요시, 나이토 노부나리, 나이토 이에나가, 와타나베 모리쓰나, 다나카 요시타다, 고리키 마사나가, 야스타다 시바타, 아사히나 야스카쓰, 쿠사카베 사다요시
시타라가하라 전투 본대오다군 무장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타다, 기타바타케 노부이(오다 노부카쓰), 오다 타다히로, 시바타 가쓰이에, 다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가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불참설 있음), 사쿠마 노부모리, 미즈노 노부모토, 타카기 키요히데, 스가야 나가요리, 가와지리 히데카타, 이나바 이테쓰, 히네노 히로나리,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 가모 우지사토,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하나와 나오마사, 후쿠토미 히데카쓰, 노노무라 마사나리, 다니와 우지쓰구, 토쿠야마 노리히데, 니시오 요지, 유아스 나오무네
도쿠가와군 무장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카즈,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마쓰다이라 시게카쓰,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아마노 야스카게, 이시카와 가즈마사, 타카치키 키요나가, 혼다 마사쓰구, 혼다 타다카쓰, 혼다 마사시게, 혼다 노부토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토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타다요·타다사 형제, 오스가 야스타카, 히라이와 친키치, 나이토 노부나리, 나이토 이에나가, 와타나베 모리쓰나, 타나카 요시타다, 타카치키 마사나가, 시바타 야스타다, 아사히나 야스카쓰, 나리세 마사카즈, 쿠사카베 사다요시
도비가스야마 공격대오다군 무장가나모리 나가치카, 사토 히데카타
도쿠가와군 무장사카이 다다쓰구, 사카이 이에쓰구,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마쓰다이라 이타다·이에타다 부자, 마쓰다이라 키요무네, 마쓰다이라 신죠, 마쓰다이라 다다쓰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동조 마쓰다이라가), 마쓰다이라 이에타다(가타하라 마쓰다이라가), 혼다 히로타카·야스시게 부자, 혼다 다다쓰구, 마키노 야스나리, 오쿠히라 사다요시, 스가누마 사다미츠, 사이고 이에카즈, 콘도 히데모토, 오가사와라 야스지, 토다 카즈니시, 오사와 모토타네, 세쓰라 사다미치(히다에서 대기)
나가시노 성 농성군오다군오쿠히라 사다마사, 마쓰다이라 카게타다


5. 2. 다케다 군

다케다 가쓰요리가 이끄는 다케다 군은 크게 시타라가하라 결전 본대와 나가시노 성 감시 부대로 나뉜다. 시타라가하라 결전 본대에는 다케다 노부카도, 오야마다 노부시게,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등 유력 가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9] 나가시노 성 감시 부대는 도비가스 산 등지의 수비대와 아루미 마을 주둔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가와쿠보 노부자네, 사에구사 모리토모, 오야마다 마사유키 등이 지휘했다.

다케다 군의 본거지인 가이 국(오늘날의 야마나시현)을 포함한 중부 고지대는 사육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고분 시대부터 말뼈와 말이빨,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왕실에 말을 바치는 어목이 운영되기도 했다. 다케다 씨의 저택 터에서는 센고쿠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말의 전신 골격이 발견되기도 했다.[59]

나가시노 전투 당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다케다 군의 기마대를 경계하여 말뚝 울타리를 설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다케다 군은 말만으로 돌진해 올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고, 당시 기록에도 "다케다의 기마 무사 수십 명이 집단을 이루어 공격해 왔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다케다 군이 기마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다케다 군의 주요 부대와 지휘관을 정리한 표이다.

부대주요 지휘관
시타라가하라 결전 본대다케다 가쓰요리, 다케다 노부카도, 오야마다 노부시게, 다케다 노부토요, 아나야마 노부키미, 모치즈키 노부나가,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하라 마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마사테루, 아토베 가쓰스케, 쓰치야 마사쓰구, 쓰치야 나오노리, 요코타 야스카게, 오바타 노부사다, 아마리 노부야스
나가시노 성 감시 부대도비가스 산 등: 가와쿠보 노부자네, 사에구사 모리토모, 나와 무네야스, 이이 야시우에몬, 고미 요소베


6. 나가시노 전투를 둘러싼 논점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서는 여러 논점이 존재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3,000정의 조총을 활용한 '3단 사격' 전술을 개발하여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병대를 격파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통설이었다. 3단 사격은 조총 부대를 3열로 배치하여 교대로 사격함으로써 재장전 시간을 벌고 지속적인 사격을 가능하게 하는 전술이다. 이러한 통설은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일본 전사 나가시노의 역』(1903년)에서 비롯되었으며, 신초기[18][22]의 기록과 에도 시대의 학자 오제 호안의 저술을 바탕으로 한다.[18][21] 도쿠토미 소호의 『근세 일본 국민사』(1918-1952) 역시 이 설을 따르며 노부나가의 혁신적인 전술을 칭찬하고 신겐식 전법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판했다.[21]

그러나 이러한 통설에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으며, 현대에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3,000정 조총을 이용한 3단 사격은 후대의 허구라는 견해가 유력하다.[2][7][22] 1980년 후지모토 마사유키는 『신초고기』에 3단 사격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설을 비판했다.[21] 『신초고기』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등 5명의 사령관에게 약 1,000정의 조총을 배치했다.[7][18][23] 조총 수에 대해서는 원본에 1,000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부 사본에는 3,000정으로 수정되어 있다. 사카이 다다쓰구 부대에 500정을 보낸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500정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3단 사격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쿠보 타다타카가 쓴 『미카와 이야기』에는 조총 수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16][18] 또한, 다케다군도 약 1,000~1,500정의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양군의 조총 보유 수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24]

201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 발견과 해석으로 나가시노 전투 연구가 진전되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새로운 전술에 다케다군이 압도당했다는 통설이 뒤집히고 다케다 가쓰요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24] 다케다군의 패인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화력 및 병력 우세, 노부나가의 병력 배치, 다케다 측의 전력 오판과 정면 공격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의 두 배인 3만 대군을 이끌었지만,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성 앞에서 진격을 멈추고 본진을 움푹 들어간 곳에 설치하여 병력이 적어 보이게 함으로써 가쓰요리를 속였다. 가쓰요리는 적을 과소평가하고 연합군의 방어 진지 구축을 방관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 후방에 분견대를 파견하여 다케다군 주력이 포위 공격을 우려하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방어진으로 돌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전투에서는 적진 돌격이 흔했기 때문에 가쓰요리의 전략이 반드시 무모했다고는 할 수 없다. 전투는 오후까지 이어졌고, 다케다 장수들 대부분은 전투 중이 아니라 후퇴 과정에서 전사했다.[25]

"다케다 기병"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며, 다케다군이 조총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대량 도입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7][25][26] 오다/도쿠가와군과 다케다군 사이에는 명확한 질적 차이가 없었고, 둘 다 일반적인 센고쿠 다이묘 군사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케다군도 기마병으로만 구성된 부대는 없었고, 기병대라고 부를 수 있는 부대도 없었다. 가쓰요리도 다수의 조총을 준비했으며, 연합군과 다케다군의 조총 장비 비율에 큰 차이가 없었다.[25][26]

나가시노 전투 재현 축제. 조총 부대 뒤쪽 간판에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힌 도리이 쿄우에몬 가쓰타가의 그림이 거꾸로 되어 있다.


다케다 씨는 신겐 시대부터 조총 장비를 장려했지만, 조총, 화약, 탄환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7][18] 반면 사카이 시를 지배하고 남만 무역을 통해 해외에서 탄환 및 화약 원료를 구입할 수 있었던 노부나가는 국산 조총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나가시노 전투터에서 발견된 탄환 분석 결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탄환은 국산, 중국 남부와 한국산, 태국산이었던 반면, 다케다군의 탄환은 중국 수입 주화와 조성이 거의 동일하여 납 부족으로 동전을 녹여 제조했음을 나타낸다. 가쓰요리는 전투 후 병사들에게 1정당 200~300발의 탄약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다케다군은 조총 수뿐만 아니라 탄약량에서도 열세였고, 적의 집중포화에 패배했다.[18][26]

나가시노 전투는 서쪽과 기나이 지방의 풍부한 물자와 보급을 자랑하는 오다 씨와 동쪽의 자원 부족한 다케다 씨 사이의 전투였다.[26]

후지타 다쓰오 교수는 나가시노 전투를 포르투갈 제국예수회 선교사와 상인을 통해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망의 지표로 보았다. 오다군이 수입 탄환을 사용했다는 사실과 노부나가와 가톨릭 선교사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27]

카이 국·시나노 국을 지배하는 다케다 씨는 에이로쿠 연간에 준가의 이마가와 씨의 영토를 병합하고(준가 침공), 겐키 연간에는 토토미 국·미카와 국 방면으로 침공했다. 미노 국을 장악한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락했고, 처음에는 다케다 씨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쇼군 요시아키와의 관계 악화 후, 겐키 3년에 반 노부나가 세력을 결집한 요시아키가 거병하면서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의 동맹국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침공(서상 작전)하여 오다 씨와 다케다 씨는 결별하게 되었다.

신겐의 급사로 서상 작전은 중단되었고, 다케다 군은 본국으로 철병했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씨·아사이 씨 등 반 노부나가 세력을 멸망시키고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했다. 자신이 “천하인”으로서의 지위를 계승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다케다 씨의 철병에 따라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영토에 대해 반격하여 미카와·토토미의 실지 회복에 힘썼다. 덴쇼 원년(1573년) 8월에는 도쿠가와 측에서 다케다 측으로 돌아섰던 오쿠미카와의 국중인 오쿠히라 사다마사(후의 오쿠히라 노부마사)가 다케다 신겐의 급사를 은폐했지만, 그의 생존을 의심한 아버지 사다요시의 결단에 따라 일족을 이끌고 도쿠가와 측에 재합류하자,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로부터 탈환한 나가시노 성에 배치했다.

다케다 씨의 후계자가 된 가쓰요리는 토토미·미카와를 재장악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40] 오쿠히라 씨의 이반으로부터 2년 후인 덴쇼 3년(1575년) 4월에는 대군을 지휘하여 미카와에 침공하고, 5월에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이에 따라 나가시노·세쓰라쿠하라에서 다케다 군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충돌에 이르렀다. 오오카 미시로(오오가라고도 함)의 내통 사건이 덴쇼 3년(1575년)의 사건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오오카의 회유에 성공한 다케다 군이 오카자키 성을 목표로 했지만, 내통이 발각되어 오오카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나가시노 방면으로 방향을 바꾼 가능성이 있다.[37][41]

『甲陽軍鑑』에서는 아토베 카츠스케, 나가사카 미츠카타 등 다케다 가쓰요리의 측근이 주전론을 주장하여, 원로 가신들의 "퇴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결전에 임했다고 하나, 『甲陽軍鑑』은 가쓰요리 시대에 아토베 가쓰스케 등 신흥 출두인과 구참 원로 가신 간의 대립이 다케다 가문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구도를 적고 있으며, 문서상으로 아토베 가쓰스케는 신겐 후기・가쓰요리 시대의 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것은 확인되고, 다케다 가문 내에서 신흥 측근층과 구참 원로층의 관계가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 기록된 일화의 배경이 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50]

『무가사기』에는, 예전부터 사쿠마 노부모리가 속여 가쓰요리에게 내통하여 배신을 약속했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진군하여 대패했다고 적혀 있다.[51] 『조산기담』에는 노부나가의 계략으로 노부모리가 나가사카 미츠카타에게 내통하여 배신을 약속하고, 미츠카타로부터 일전을 권유받은 가쓰요리가 바바 노부하루 등의 의견을 쓰지 않고 진군을 결단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52]

전년의 제1차 다카텐진성 전투에서의 압승으로 자신감 과잉이 되어 이길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설이나, 도비가네야마에 사카이 다다쓰구의 별동대 3,000명의 우회를 다케다 군은 인지하고 있었고,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반대 전개를 노렸다는 설 등이 있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신겐 후기 시대 시점에서 오다 가문은 오와리, 미노, 남오미, 북이세, 야마시로 등 기나이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고, 단독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했다. 신겐은 기나이 근국에서 아사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 및 이시야마 홍난사(일향종) 등 각 세력에 의해 오다 가문의 병력을 구속시키고, 동방으로 향하는 병력을 제한한 뒤 미카와・오와리 또는 미노에서 오다와 결전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제2차 오다 노부나가 포위망). 뒤를 이은 가쓰요리도 그 기본 전략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유력한 세력이었던 아사이・아사쿠라나 나가시마 일향종은 가쓰요리 시대에는 이미 멸망했고, 다케다 가문과 본원사만 남게 되었다. 오다 가문의 세력 신장은 급속했고, 날마다 국력의 차이가 벌어지는 현황을 고려하면, 빠른 단계에서 오다 가문과 주력 결전을 행하고 결정타를 줄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오오카 야시로의 내통에 의한 오카자키 성 점령이 이번 출병의 목적이었다는 설[37]에 따른다면, 야시로가 살해되어 점령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카이로 퇴각할 수는 없었다는 사정도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노부나가의 입장에서 보면, 다케다와 직접 싸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전략적으로 유리하게 될 것이고, 이 시점에서 싸울 필요는 반드시 없었다. 노부나가 자신이 출진한 것으로 도쿠가와에 대한 의리(후지메)도 다하고 있다. 애초에 나가시노 전투의 주목적은, 나가시노에서 다케다를 퇴각시키는 것이다. 합전을 해도 지지만 않으면 좋고, 다케다 측이 공격해 온다는 전제로 진영을 쌓고, 철포를 대량으로 배치한 것은 목적에 부합했다.

도쿠가와 가문으로서는, 향후 도토미 공략을 전망하면, 이번에 반드시 합전을 일으켜, 강력한 오다의 원군이 있는 때에 다케다를 쳐두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특히 도비가네야마 요새 공격의 발안은 도쿠가와 측이다). 이 전투로 도쿠가와 가문의 목적은 성공하여, 오랫동안 다케다 가문과 소규모 충돌을 계속해 온 미카와를 완전히 장악하고, 이후, 역사적 참패로 약체화된 다케다 가문을 상대로 공세에 나서는데 성공하고 있다.

다카자와 히토시는 오다・도쿠가와 측은 이미 2월 단계에서 사쿠마 노부모리를 파견하여 합전지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여 정보를 공유했기 때문에, 나가시노 전투는 아네가와 전투처럼 미리 다케다 측에 합전 일시와 합전지를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보이고 있으며, 이 합전은 처음부터 노부나가에 의해 계획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53]

나가시노 전투에서 특필할 만한 점으로 오다 가문이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3,000정의 철포를 준비하여 병사들에게 배포하고, 신전법인 삼단격을 실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통설에서는 당시 최신 병기였던 철포를 3,000정이나 준비하고, 더 나아가 신전법인 삼단격을 실행한 오다군 앞에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다케다의 기병대는 속수무책으로 섬멸당했다고 하나, 애초에 병력에 2배 이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 아니라, 경과 및 승인에 대해서는 여러 쟁점에서 이견이 존재한다.

통설인 철포 3,000정이라는 수치는 호안본 『신장기』와 이케다본 『신장공기』가 출전이다. 호안본은 자료로서의 신용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고 여겨지며, 자료적 신용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이케다본에서는 1,000정이라고 적힌 뒤에 "삼(三)"자가 옆에 추가로 적혀 있는 점에 신빙성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호안본의 3,000정이 독자적으로 유포된 후세의 가필인지, 혹은 필적을 잘못하여 현장에서 가필 수정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삼(三)"자는 返り点과 거의 같은 크기로 적혀 있으며, 필적을 잘못하여 현장에서 가필했다는 것은 다소 생각하기 어렵다.

오타 규이치의 『신장공기』에서는 결전에 사용된 철포 수에 관해서 "천정(千挺)'''계(計)'''"('''약(約)''' 1,000정), 도비가네야마 공격의 별동대가 "오백정(五百挺)"이라고 적혀 있으며(계 약 1,500정), 3,000정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천정계"는 사사 나리마사, 마에다 도시이에, 노노무라 마사나리, 후쿠토미 히데카츠, 하나와 나오마사의 5명의 봉행에게 배치한 것이라고 적혀 있을 뿐, 이 5명의 무장 이외의 부대의 철포 수에는 언급이 없다. 또한 노부나가는 이 전투 직전, 참진하지 않은 호소카와 후지타카나 츠츠이 준케이 등에게 철포대를 제공하도록 명령했으며, 호소카와는 100명, 츠츠이는 50명을 제공했다. 아마 다른 무장들로부터도 철포대 제공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더 나아가 철포 용병단으로 유명한 네구리 슈도 참전했다. 즉, 오타는 전체의 정확한 철포 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며, 1,500정은 생각할 수 있는 최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오다 가문이 철포를 얼마나 모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보다 6년 후인 천정 9년(1581년)에 정해진 아케치 미쓰히데 가중의 군법에 따르면, 천석 취에 군역 60명, 그중 철포 5정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한 오다군의 병력을 통설에 따라 30,000명으로 하고, 참전하지 않은 무장에게도 철포대를 제공시킨 사실을 고려하면, 수천 정 정도는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하여 오다 가문이 사용한 철포 수가 통설보다 적은 1,000정이었다고 해도, 당시로서는 충분히 특필할 만한 수치이다. 다케다군 전군이 통설대로 1만 수천 명이라고 가정하면, 가쓰요리 본대를 제외하고, 전사한 바바대, 나이토대, 야마가타대, 사나다 형제대, 츠치야대나, 퇴각한 아나야마대, 다케다 노부카츠대, 다케다 노부토요대 등으로 나누면, 부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부대의 인원은 2,000명에 달하지 않는다. 이 부대 단위로 생각하면, 오다군의 철포가 1,000정이었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상당한 수이다(도쿠가와 가문의 철포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철포 삼단격"은 유명한 전법이지만, 실재는 의문시되고 있다. 『신장공기』에는 철포 봉행 5명에게 지휘를 맡겼다고만 적혀 있으며, 구체적인 전법, 즉 삼단격을 실시했다는 기록은 없고, 최초의 기록은 에도 시대에 출판된 통속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을 메이지 시대의 교과서가 사실로 기재한 것으로부터, 순식간에 "삼단격"설이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나와 유키오는 현대에 화승총의 발사를 재현한 경험에서 "삼단격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55]

『신장공기』에는 "다케다 기병대가 몰려왔을 때, 철포의 일제 사격으로 대부분이 쓰러져 순식간에 군사가 없어졌다"는 철포의 타격력을 보여주는 묘사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가시노 전투의 서전에서, 다케다군은 가로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선봉으로 오다 진영을 공격했지만, 오다군의 아시가루는 몸을 숨긴 채 철포만 계속 쏘았고,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자는 없었다. 야마가타대는 철포에 맞아 후퇴했고, 다음으로 2번째, 3번째와 차례차례로 신병을 내보냈지만, 그것도 또한 과반수가 철포의 희생이 되었다(요약)"고 한다. 단, 정말로 그 정도의 피해를 입혔는지는 별도로 의문이 남는다. 죽지 않더라도 부상병이 되면, 이것을 물리칠 필요가 있으며, 부상한 사람을 후송시키는 데에도 최소 1명, 즉 총 2명 이상을 전선에서 멀리해야 한다. 구체적인 운용법은 불명이지만, 철포대를 어느 정도 집중시킨 부대로 기능시키고 있다면, 1회의 사격으로 부대 단위의 전력을 크게 소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삼단격이 아니더라도 다케다군을 소모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보인 '''武田(다케다)의 기병대'''를 대표로 하는 전국 시대 기병군의 실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

7. 관련 문화 콘텐츠

근세에는 병풍 그림에서 군기류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명한 전국시대 전투의 모습을 그린 전국합전도 병풍이 제작되었고, 나가시노 전투도 병풍은 10점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61] 현존하는 작품 중 원본으로 생각되는 것은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가로로 이누야마번주 나리세씨에 전해진 「나가시노 전투도 병풍」(이누야마성 백제문고 소장)이다. 나리세본은 육곡일쌍의 본마 병풍으로 「나가쿠테 전투도 병풍」과 짝을 이룬다. 나가시노 전투도는 우측에 해당한다. 지본 채색이며, 크기는 세로 165.2cm, 가로 350.8cm이다.

화면 구성은 오른쪽 끝 한 폭에는 오오노가와·칸사가와에 그려진 나가시노성과 성주인 오쿠히라 사다마사의 모습, 오른쪽 아래에는 토비노스야마 요새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폭에는 다케다 가쓰요리의 본진이 그려져 있고, 상부에는 마바 노부하루의 최후가 그려져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폭에는 세쓰라하라에서의 결전 모습이 그려져 있고, 말 방책으로 보호받는 도쿠가와군의 철포대와 돌격하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기병대가 그려져 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폭에는 오다·도쿠가와군의 본진이 그려져 있고,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외에 하시바 히데요시와 다키가와 가즈마스 등 여러 장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특히 도쿠가와군의 진영이 크게 그려져 있으며 나리세씨의 시조인 나리세 마사카즈 외 도쿠가와가의 세대 가신인 여러 장수가 그려져 있다.

마에다 토시이에군의 사격 대상을 사나다 노부쓰나·마사테루 형제로 하는 구도는, 나가시노 전투로부터 39년 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토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토시미쓰군이 사나다 형제의 조카 사나다 노부시게가 이끄는 사나다마루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것과 대조적이다.

오사카성 천수각과 도쿠가와 미술관도 「나가시노 전투도 병풍」을 소장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나리세가본을 베낀 것이며, 자연 묘사로 보아 오사카성 천수각본은 나리세가본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 도쿠가와 미술관본은 에도 시대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나고야시 박물관본은 전투의 정보량이 적고, 회화 양식으로 보아 나리세본보다 오래된 17세기 전반 겐나부터 간에이 전기 무렵의 제작으로 보인다. 작자는 와요에 계열의 화가이다. 원래는 육곡일쌍으로 나가시노 전투도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것을 육곡일지로 정리하면서 내용을 충실하게 하고, 더욱 좌측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도를 추가한 것이 나리세본이라고 추측된다.[62][63]


  • 오이타현나카쓰시의 오쿠히라 신사에서는 신겐의 나가시노 포위를 기념하여 매년 5월에 예대제 "타니시 마쓰리"가 개최된다.[64]
  • 아이치현신시로시에서는 전투에서 죽은 양군 장병의 위령을 위해 매년 5월에 "나가시노 전투 노보리 마쓰리"가 개최되며, 법요·합전 행렬·화승총 등의 연무 등이 행해진다.[65]


;소설

  • 이토 준 『천지뢰동(天地雷動)』(2014년 4월 가도카와쇼텐)
  • 스즈키 키이치로 『나가시노의 네 사람, 노부나가의 난제(長篠の四人 信長の難題)』(2015년 9월 마이니치신문출판)


;영화

;음악

  • 사쿠라유키『나가시노(長篠)』(오다・도쿠가와, 다케다 양군의 관점에서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곡/작사: 오구리 사쿠라, 작곡: 이세 켄지)


;게임

  • 오다 노부나가(반다이 if 시리즈)
  • 오다 철포대(에폭사 EWE 시리즈)
  • 다케다 성쇠기(쓰쿠다호비)
  • 나가시노・세쓰가하라 합전(워게임 일본사)
  •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코에이테크모게임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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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웹사이트 武田勝頼は鉄砲をナメていたから負けたのではない…教科書が教えない「長篠の戦いで信長が勝った本当の理由」 https://president.jp[...] President 2023-06-11
[25] 웹사이트 鉄砲3段撃ちはあったか(後篇) https://agora-web.jp[...] 2023-07-17
[26] 웹사이트 教科書に書かれていない「信長が長篠の戦いで武田勝頼に勝った本当の理由」 最新研究が明かす武田軍と織田軍の決定的な違い https://www.newsweek[...] Nikkei Business Publications 2023-06-20
[27] 웹사이트 日本はポルトガル領になる予定だった…「長篠の合戦」で織田信長の鉄砲隊をイエズス会が支えたワケ https://president.jp[...] President Inc. 2022
[28] 문서 徳川実紀
[29] 문서 三河物語
[30] 문서 信長公記
[31] 문서 徳川実紀および三河物語
[32] 문서 兼見卿記
[33] 문서 多聞院日記
[34] 서적 武田信玄と勝頼 岩波新書 2007
[35] 간행물 戦国大名武田氏の遠江・三河侵攻再考 2007
[36] 서적 長篠合戦の政治背景 高志書院
[37] 간행물 長篠合戦再考-その政治的背景と展開-
[38] 간행물 足利義昭政権と武田信玄 : 元亀争乱の展開再考 吉川弘文館 2016-06
[39] 서적 三河国衆奥平氏の動向と態様 岩田書院
[40] 서적 武田勝頼の外交政策 新人物往来社
[41] 서적 戦国・織豊期大名徳川氏の領国支配 岩田書院
[42] 문서 甫庵信長記・三河物語
[43] 서적 検証・長篠合戦 吉川弘文館
[44] 문서 三州長篠御合戦の事
[45] 서적 長篠・設楽原合戦の真実 甲斐武田軍団はなぜ壊滅したか 雄山閣出版
[46] 웹사이트 『常山紀談』巻之四「酒井忠次鴟巣城を乗り取られし事」 {{NDLDC|946584/246}}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2013-10-30
[47] 문서 画像最右の集落の字名は「信玄」、その左の水田を流れる小規模河川が連吾川、更に左手尾根を超えた画像中央の水田を流れるのが大宮川である。このように設楽原とは言っても丘陵と谷の連なる起伏に富んだ地形である。
[48] 문서 戦国遺文 武田氏編 - 2495号・3704号
[49] 간행물 天正三年の房越同盟の復活 戎光祥出版
[50] 서적 武田氏の領域支配と取次-奉書式朱印状の奉者をめぐって- 岩田書院
[51] 웹사이트 『武家事紀』巻第十三 {{NDLDC|946584/249}}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2013-10-30
[52] 웹사이트 『常山紀談』巻之四「佐久間信盛偽りて勝頼に降る事」 {{NDLDC|1018103/81}}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2013-10-30
[53] 서적 新・信長公記 ブイツーショリューション
[54] 서적 武田信玄の家臣団編成 新人物往来社
[55] 서적 長篠・設楽原合戦の真実 雄山閣
[56] 문서 鉄砲隊の背後の看板の「鳥居強右衛門の逆さ磔」絵柄は上下逆。
[57] 서적 戦国時代の計略大全 PHP研究所
[58] 서적 敗者の日本史9・長篠合戦と武田勝頼 吉川弘文社
[59] 문서 甲斐の黒駒
[60] 문서 左端に描かれている鹿角の兜の武者は本多忠勝。その側に幡旗の一部を持つのが原田弥之助(忠勝家臣)。馬防柵の前に並ぶのは徳川勢で、上から騎乗の武将は内藤信成、大久保忠世、大久保忠佐。原田と忠佐の間に描かれた鉢巻姿の武者が成瀬正一である。右端の首のない武田武者は、銃弾に倒れた山県昌景で、家臣志村又右衛門が首級を奪われまいと走り去る光景である。画面中央の溝は連吾川で、汚れのようなモヤは鉄砲の硝煙を表現したもの。
[61] 서적 戦国合戦図屏風の世界 和歌山県立博物館 1997-10
[62] 서적 戦国合戦図屏風の世界 和歌山県立博物館 1997-10
[63] 서적 戦国合戦絵屏風集成 第一巻 川中島合戦図 長篠合戦図 中央公論社
[64] 웹사이트 奥平信昌 https://www.city.shi[...] 新城市 2020-03-30
[65] 웹사이트 長篠合戦のぼりまつり https://shinshirokan[...] 新城市観光協会 2020-03-30
[66] 문서 この作品のラストシーンに長篠の戦いの場面が登場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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